[SID 잠실운동장 스토리 공모전] 수상작 최우수상 : 잠실야구장에 가면 아버지가 있다

2019.12.18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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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제 목

잠실야구장에 가면 아버지가 있다

작품요약

어린시절,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아버지는 야구를 좋아했던 나와 오빠를 데리고 잠실야구장에 가는 일만큼은 빼놓지 않으셨다. 잠실야구장에는 그 옛날 아버지와의 따스한 추억이 있고, 함성이 있고, 응원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가득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 그럴 때면 나는 습관처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잠실야구장을 찾는다. 그곳에 가면 낯익은 공간에 스며있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옛 추억은 항상 나의 휑한 가슴을 따스하게 채워준다. 그리고 어느 새 나를 아버지와 함께 생일날 잠실야구장을 찾은 어린 소녀로 되돌려놓곤 한다.

 

아빠, 이제 어떻게 해. 벌써 원아웃이야.”

걱정하지 마~ 다음 타자가 김형석이니까 큰 거 한방 쳐 줄 거야. 기대해!”

9회말 원아웃, 우리가 응원하는 OB베어스가 한 점 차이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셨을까. 아버지의 말대로 그날 4번 타자 김형석이 결승 안타를 쳐 OB베어스가 극적으로 승리했다. 기쁜 마음에 오빠와 내 손을 부여잡고 함박웃음을 짓던 아버지. 평소 말수도 적고 조용하던 아버지가 목이 쉴 만큼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그린 듯 선하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병원에서 청원 경찰로 일하고 있었고, 엄마는 빠듯한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매사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혹여 놀이동산에 놀러가거나 외식을 하러 나간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잠실야구장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담뱃값과 점심값을 아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오빠와 내 손을 잡고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그 시절 야구 관람은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고, 아버지는 그 선물을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오빠와 내가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야구와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듣고 자랐다. 원래는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야구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듣는 사이 어느새 재미를 붙이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OB베어스를 좋아했다. 1번부터 9번 타자까지 타순에 나와 있는 모든 선수들의 이름과 타율을 외웠고, 프로필 카드를 따로 수집할 정도였다. 주말에는 아버지, 오빠와 함께 공터에 나가 캐치볼을 할 만큼 야구에 푹 빠져 지냈다.

내가 잠실야구장에 처음 가본 건 아홉 살 때였다. 내 생일을 맞아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잠실야구장으로 데리고 가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TV를 통해서만 접했던 야구를 직접 관람한다는 생각에 전날부터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던지 .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빠와 같이 잠실야구장을 방문한 그날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야구장 밖에는 수많은 인파가 북적대고 있었고, 김밥과 간식거리 등을 파는 상인들로 잠실야구장은 시작 전부터 잔뜩 흥에 들떠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인 오징어를 품에 안겨 주며 어린 딸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보듬어 주었다.

잠실야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운동장 크기와 규모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시선을 압도하는 큰 스크린과 일명 덕아웃이라고 부르는 선수들 대기석도 눈에 들어왔다. 2만석이 훌쩍 넘는 공간을 수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화려한 그림처럼 수놓은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버지는 신기해하는 나를 향해 19827월에 준공된 잠실야구장이 개장 당시부터 메이저리그 구장을 방불케 하는 국제적인 규격으로 화제를 모았다며, OB베어스가 1986년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해오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야구 경기가 시작되자, 타구 하나 하나에 온 관중의 신경이 집중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실야구장 가득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내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데이트를 하러 온 젊은 청춘의 살가운 표정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의 진지한 모습, 아이들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야구 관람을 하는 일가족의 훈훈한 모습 등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사연은 다를지라도 잠실야구장에 온 이유와 각자 느끼는 감정은 비슷해 보였다. 인생을 좀 더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 또는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을 쌓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관중들의 함성소리였다.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 사람들 입에서 튀어나와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져 사방으로 퍼지는 함성은 매우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경기 중간 중간에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찬 삶의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몇 명이서 내지르는 함성이었다면 그렇게 매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만 명이 모여서 내지르는 함성은 아름답고도 경이로웠다. 얼룩진 마음을 모두 잠실야구장 안에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야구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삶에 시달리고 들볶이고 부대낀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만 명이 보여주는 힘찬 삶의 에너지에 어느덧 나도 함께 융화되어갔다. 난생처음 찾아간 잠실야구장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함성을 질렀다. 이미 내가 응원하는 팀의 승패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팀이 이겨준다면 더 즐겁게 응원할 뿐이고, 진다고 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성원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나와 오빠를 데리고 잠실야구장으로 가 OB베어스 경기를 관람시켜 주었다. 빠듯한 형편에도 우리 남매를 데리고 잠실야구장에 가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분명히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는 늘 집 근처 시장에 들러서 통닭 한 마디를 사셨다. 집에 돌아와 우리 네 가족이 빙 둘러 앉아 함께 먹는 통닭은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그 통닭에는 가족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뿍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잠실야구장 나들이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오빠가 고3 수험생이 되면서 자연스레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중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최소한 1년에 두어 차례 정도는 아버지와 함께 잠실야구장에 가서 야구경기를 관람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잠실야구장에서의 추억은 내게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로 남아있다. 비록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삶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를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지금도 잠실야구장에 가면 유년의 향수와 아버지와의 추억이 동시에 떠오르곤 한다. 저마다의 소중한 꿈과 사연들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잠실야구장. 그곳에서는 나이가 든 사람이나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함께 웃고 즐기며 행복해 할 수 있다. 잠실야구장에서 풍겨오는 정제되지 않은 사람냄새가 나는 지금도 참 좋다.

개장 후 37년 간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렸던 잠실야구장. 30여 년 전 내 생일날 잠실야구장에서 느꼈던 뜨거운 열정과 아버지의 사랑은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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